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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패권주의, ‘제2창당’론에 대한 다함께의 입장

심상정 의원과 노회찬 의원이 분당은 안 된다고 밝히자 분당론자들은 ‘제2창당’론 뒤에 숨고 있다. 그러나 〈민중의소리〉에 폭로된 한석호 문건이나 〈레디앙〉에 연재된 장석준 구상, 중앙당 게시판에 올린 구형구 소론, 조승수 전 의원 인터뷰 등을 읽어 본 사람은 누구든 분당파가 지금 단지 작전상 후퇴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뿐 아니라 다른 분당론자들도 모두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청산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물론 다함께는 맑스주의 분석에 근거해 남한과 꼭 마찬가지로 북한이 민중을 억압하고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사회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자주파에게 ‘종북’은 매우 모욕적인 말이다. 자주성 없는 꼭두각시라는 함의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 정권의 입장과 정책이라면 무엇이든 지지하는 자주파도 소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그가 꼭두각시라서가 아니라, 미국 제국주의와 남한 내 그 지지자들에 대한 증오에 판단이 흐려져, 방어할 수 없는 것을 ‘불가피성’의 논리로 헛되이 방어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자주파는 북한 대외정책의 단순한 지지자가 아니다. 자주파가 딛고 있는 발판이 남한의 피억압 민중이므로 자주파의 대다수는 북한 정부의 입장과 정책을 단순히 지지할 수만은 없다. 북한 정부가 2006년 남한 지방선거에 대해 한나라당의 패배를 위해 열우당에 투표하라고 했을 때 민주노동당 내 자주파의 소수라도 그것을 따랐던가? 이번 대선에서도 북한은 실상 정동영 지지를 강하게 암시했다. 하지만 대다수 자주파는 이를 못 본 척 보아넘겼다.

또, 자주파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인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서도 그들의 다수는 통일 뒤에도 주한미군이 역할 규정을 바꿔 계속 주둔해도 된다는 북한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또, 북한이 WTO에 가입하기를 원한다 해서 WTO를 지지하는 남한 내 자주파는 많지 않다.

이런 예는 이밖에도 허다하다. 이 모든 사례들은 남한 자주파의 갈수록 모순된 입장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이 그저 북한 관료의 남한 내 분신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보여 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종북’ 반대론자들이 9·11 이후 세계를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요인인 제국주의적 공세, 특히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핵폭탄을 실제로 사용한 바 있고 현재 1만 6백여 개의 첨단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기껏해야 예닐곱 개의 조야한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북한 가운데 누가 비할 데 없이 훨씬 더 큰 문제인가? 자기 국경 내의 2천3백만 명을 억압·착취하고 고통에 빠뜨리는 북한 국가가 더 큰 문제인가, 아니면 자기 국경 안팎의 수십억 주민들을 억압·착취하고 고통에 빠뜨리고 심지어 전쟁으로 대량 학살하는 미국 국가가 비할 데 없이 훨씬 더 큰 문제인가?

그리고 ‘종북’ 반대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조승수·주대환 같은 노골적인 우파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도 기꺼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도 큰 문제다. 점입가경 격으로 조갑제조차 민주노동당 내분 사태에 끼어들어 ‘종북주의자들’에게 반대한 분당을 선동하고 있지 않은가!

패권주의로 말하자면, 수로 밀어붙인다는 뜻인데, 다정파 연합인 민주노동당을 그렇게 운영한다면 당 운영에 자기 목소리를 반영하기를 바라는 소수파를 소원케 해 갈등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그래서 다함께는 민주노동당을 ‘당’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느슨한 연합체(공동전선)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설사 백보 양보해 강경 자주파처럼 ‘당’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민주집중제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강경 자주파는 민주집중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이다. 하지만 다수가 언제나 옳은 것으로 판명되는 것은 아니기에 소수의 의사도 존중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래서 민주집중제 지지자들도 정기 대의원 회의 전 한정된 기간 동안 소수파의 주장이 온전히 개진될 권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소수 의사 존중론이 사실상의 다수결 부정으로 오해되는 것에 대해 19세기 후반 영국의 위대한 사회주의자 윌리암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사람들은 연합해서 집행해야 할 것이고, 때때로 의견 차이가 빚어질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당이 양보해야 하는가? 우리의 아나키스트 동지들은 다수파가 이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소수파가 이겨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소수파에게 신성한 권리라도 있다는 말인가?”

이 말에 자주파 동지들은 반색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자주파 동지들은 민주적 집중이 아니라 관료적 집중을 실천하곤 했기 때문이다. 즉, 평당원들의 충분한 토론과 논쟁 없이 행정적으로 당헌·당규·당기구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때는 민주집중제를 거부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민주집중제를 지지하는 다함께 같은 사람들도 언짢았다. 바로 지금 일부 강경 자주파들이 비례대표 선정권 문제를 양보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그런 사례에 속한다.

비례대표 후보 문제가 해당 자주파 개인들의 출세 문제가 아니라 자주파 동지들의 정치적 전략과 관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평등파뿐 아니라 자주파 동지들 가운데도 대중 정치인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래야 그동안의 자본가 포퓰리스트 정치인에 신물이 난 진보 염원 대중에게 훌륭한 정치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주파 소속 대중 정치인의 등장은 또한 자주파 동지들이 바로 지금의 당내 갈등이나 북핵 실험 사건, 일심회 사건 등의 상황에 직면해 토론을 회피하고 그저 두루뭉술하게, 또 행정적으로 문제를 처리하는 비민주적·음모적·관료적 관행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이유야 어떻든 당내 분란이 비정상적 상태여서 이런 때야말로 다수파가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야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비상사태이다. 또, 지금 양보해야 자주파에 반대해 일시적으로 뭉친 갖가지 이질적인 조류와 집단, 개인들이 제시하는 당의 미래에 대한 상이한 비전이 과연 무엇으로 판명나는지 대중에게 입증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자주파 동지들이 대중 정치인을 배출하고 싶다면 이번에는 비례대표제보다는 지역구로 출마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자본가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비례대표제로 당선한 국회의원보다는 지역구에서 유권자의 선출로 당선한 국회의원이 더 영향력이 강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논술한 것을 근거로 다함께는 확대간부회의가 제안한 비대위 안을 지지한다. 그리고 당의 결속을 바라는 당원들도 그러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비대위가 자신의 당 쇄신 임무에 분당론자들이 요구하는 성격의 ‘제2창당’을 포함하려 한다면 한사코, 단호히 반대할 것이다. 우리가 보수적이어서가 아니다. 우리도 당이 당권을 둘러싼 정파 간 갈등을 비롯한 기존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개방적이고 우호적이며 협력적인 정치 구조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심의원과 노의원 주위에서 흘러나오는 ‘제2창당’론은 그 진의가 매우 의심스럽다. 따지고 보면, 현 당강령과 당헌·당규는 그 밑바탕이 바로 당 초기 시절에 평등파 자신에 의해 고안된 것 아닌가. 그럼에도 그것을 뜯어고치겠다는 것은, 그동안 일부 평등파 지도자들의 언행과 평등파 사이에서 자체 비판 없이 불쑥불쑥 개진돼 온 기회주의적 주장들에 비춰볼 때, 자주파와 좌파(오늘 주대환이 말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언행을 검열해 당을 우경화시키겠다는 저의가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당강령과 주요 당헌·당규 개정은 비대위의 임무가 끝난 총선 이후 평당원들의 충분한 토론과 그에 기초한 당대회 토론을 거친 의사결정 과정의 산물이어야지, 총선 참여를 성공적으로 지도할 사명을 갖는 비대위의 임무가 아니다. 우리는 당의 분열을 우려하지만, 못지않게 당의 우경화도 우려한다.

우리의 요구:
– 분당론자들은 분당 음모를 중단해야 한다
– 강경 자주파는 패권주의를 반성하고 중단해야 한다
– 비대위는 당의 결속을 강화해 총선 참여를 성공적으로 지도한다는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2008년 1월 8일
다함께 운영위원회(다함께 회원들을 대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