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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대중파업은 어떻게 가능한가?

2006년 12월 4일
 

   

진정한 대중파업은 어떻게 가능한가?

대중파업은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도전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콜린 바커가 말한다. 수십 년 동안 영국 맨체스터 노동자 운동에 활발히 관여해 온 66세의 노혁명가 콜린 바커는 폴란드 연대노조의 역사를 다룬 책인 ≪피억압자들의 축제(Festival of the Oppressed)≫(London, Bookmarks, 1986)의 저자이자 논문 모음집인 ≪혁명의 리허설(Revolutionary Rehearsals)≫(London, Bookmarks, 1987)의 편집자이다.

지난 달[2005년 12월] 아일랜드에서 선원들의 임금 인상 요구를 지지하는 하루 대중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 세계에서 더욱 빈번히 벌어지고 있는 대중파업 물결의 가장 최근 사례에 해당한다.
<소셜리스트 워커> 웹사이트를 대충만 검색해 봐도 2000년 초 이후 아프리카·아시아·유럽·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대중파업 소식을 적어도 58건이나 찾을 수 있다. 평균적으로 5.5주마다 한 번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선가 대중파업이 벌어진 셈이다.
이러한 대중파업을 아우르는 한 가지 대의가 있다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이러저러한 폐해에 맞선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연료 가격 폭등, 사유화, IMF 정책, 연금 개악 저지 등이 두드러진 쟁점들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대중파업은 신자유주의 정부들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1백 년 전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에 대한 최초의 진지한 저작을 썼다.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국역: ≪대중파업론≫, 풀무질]이라는 소책자에서 1905년 러시아에서 벌어진 투쟁을 탐구했다. 그녀는 대중파업이 이제 노동자들의 혁명적 동원에서 핵심임을 논증했다.
러시아의 대중파업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경제 파업들이 신속히 정치적 요구들을 제기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요구를 둘러싼 파업들은 경제 파업 물결을 일으켰다.
조직적 창발성은 러시아 운동의 특징이었다. 노동자들은 놀라우리만큼 신속하게 새로운 조직들 ― 노조에서 정치 단체까지 ― 을 창출하고 가입했다. 물론 여기에는 노동자 평의회 ― 러시아어로 소비에트라고 하는 ― 도 포함됐다.
활동가들은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숙련도·성별·인종 따위의 낡은 분할들을 새로운 연대가 대체했다.
룩셈부르크는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 대중의 정신과 문화의 변화라고 말했다. 대중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힘을 새로 자각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난생 처음 더 나은 세계를 집단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고 느낀다.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이 자본주의적 현재와 사회주의적 미래를 잇는 결정적 가교라고 주장했다. 대중파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결집해 다른 세계를 위해 싸울 수 있고 또 그런 세계를 운영할 수 있는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다.
룩셈부르크의 이 탁월한 소책자는 단지 대중파업을 상세히 분석하고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노조 관료와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실천의 대안으로 대중파업을 제시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활동을 경제적 문제로 제한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정치를 의회 선거라는 협소한 범주로 제한했다. 둘 다 수많은 미조직 노동자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대중파업은 이런 한계들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룩셈부르크의 소책자는 혁명적 사회주의의 위대한 저작들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대중파업이 혁명적 도전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경제·정치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그런 도전 말이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는 노조 지도자들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개량주의적 전통에 반대한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위로부터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한다.

과대평가

그러나 이 소책자에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중파업을 찬양하다 보니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이 노조 관료와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을 거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룩셈부르크가 대중이 분출하면 노조와 당 관료들의 보수주의를 일소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주장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그녀는 일단 그러한 분출이 시작되면 결코 억누를 수 없을 것이라는 ― 매우 잘못된 ―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일단 공이 구르기 시작하면 사회민주주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코 그것을 다시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잠재적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이 점은 바로 제1차세계대전 말엽 룩셈부르크 자신이 몸담았던 독일 노동운동에서 비극적으로 드러났다.
전쟁은 ― 룩셈부르크가 찬양했던 러시아의 1905년 혁명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 엄청난 혁명적 물결과 함께 끝났다. 병사와 노동자들의 평의회가 우후죽순 생겨났고, 사병 반란과 대중파업이 만연했다. 독일의 1918∼19년이야말로 "공이 구르는" 때였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에 반대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일소되지 않았다. 그들은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당대의 토니 블레어라고 할 수 있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명확한 목표를 위해, 즉 국가적 손실을 막을 수 있도록 파업을 신속히 끝내기 위해 파업 지도부에 참가했다." 심지어 그는 야만적 폭력으로 전투적 노동자들을 분쇄하는 데 우익 군장교들과 협력했다.
그런 장교들이 1919년 1월에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했다. 그 뒤 4년 반에 걸친 소요 기간 내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시종일관 혁명적 물결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분명히 그저 대중파업의 자생성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규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모든 대중 운동에는 항상 내부적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일부 독일 노동자들은 혁명적 결론에 이끌렸지만,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은 난생 처음 집단 행동을 만끽하며 노조에 가입하고 있었다.
노조 관료들의 기반은 위협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확대됐다. 운동은 전진하고 있었지만, 그 속도는 제각각이었다. 그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 또는 도전받을 수 있는 ― 여지가 생겨났다.
간단히 말해, 거대한 파업 물결이 계속되는 동안에조차 전체 노동자 운동 안에는 여전히 정치적 전투가 남아 있었다. 그러한 파업 물결은 결국 혁명적 변화라는 생각에 이끌리는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정치 조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관료적 대중파업

룩셈부르크의 소책자에 묘사된 것과는 다른 종류의 대중파업도 있다. 1905년 러시아 대중파업은 혁명의 일부였다.
그러나 비록 현장조합원들의 전투성이 가하는 압력 때문이라 하더라도 노조 지도자들 스스로 대중파업을 호소하고 조심스럽게 그 과정을 통제하다가 그들 맘대로 끝내버릴 수도 있다.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창건자인 토니 클리프는 이 경우를 일컬어 "관료적 대중파업"이라고 불렀다.
지난 달[2005년 12월] 아일랜드 노동조합총연맹(TUC) 위원장은 더블린 시위를 별 탈 없이 끝내기 위해 경찰과 협력하고 있음을 조심스레 강조했다.
수만 명이 행동 호소에 응했다. 그러나 행동은 단지 하루에 그칠 것이라는 점이 강조됐다. 심지어 아일랜드 총리조차 [파업을] 용인했다.
1926년 영국 총파업은 룩셈부르크가 묘사했던 것보다는 관료적 대중파업에 더 가까웠다. 영국 노총(TUC)은 끝까지 통제력을 유지했고, 심지어 파업이 계속 성장하고 있는 와중에 파업을 취소했다. 광부들은 혼자 싸워야 했고 결국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철도노조 지도자인 지미 토머스는 파업을 끝낸 다음 날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내가 이번 파업에서 다른 무엇보다 우려한 것은 이렇다. 만에 하나 파업이 일정한 통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의 손을 벗어났다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제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아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데 대해 신께 감사할 뿐이다."
다른 대중파업들은 관료적 형태와 혁명적 형태를 결합한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공식 노조들이 학생들과의 연대를 위해 하루 총파업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좌파 활동가들이 낭트에서 공장 점거를 이끌었고, 이것은 작업장 점거와 파업의 거대한 물결을 일으켰다. [그래서]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중파업이 벌어졌다.
그러나 심지어 5월 사태 동안에도 노조와 당의 관료들은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떼어놓았고, 많은 점거 작업장의 공산당 활동가들은 대다수 노동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민주적 통제도 점거된 작업장 사이의 연계도 매우 드물었다. [그래서] 노조 지도자들은 투쟁 물결을 끝내기 위한 거짓말을 파업 노동자들에게 해댈 수 있었다.
반면,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은 [1968년보다] 규모는 더 작았지만, 서로 다른 노동자 단체들의 공동 대중집회들을 통해 더 많은 상호연계와 공동 대응이 조직됐다.
대중파업의 발전은 현장조합원 활동가들이 노조 관료들로부터 통제력을 되찾아 올 수 있는 정도, 그리고 동료 노동자들을 운동 건설 과정에 참여시킬 수 있는 정도에 상당 부분 달려있다.
이러한 발전이 최고 수준에 이른 사례 가운데 하나가 1980년 폴란드에서 ’연대노조’를 탄생시킨 투쟁들이었다.
지역의 ’공장 연계 파업위원회들’은 정부가 자신들과 협상하도록 만들었다. 실제 협상들은 밀실이 아니라 수백 개의 점거 작업장에서 파견된 대표자들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고, 확성기를 통해 [협상 실황이] 방송됐다.
대중파업이 형식적인 하루 행동을 넘어설 경우, 노동자들은 종종 다양한 사회 활동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곤 한다. 예컨대, 1919년 미국 시애틀에서는 파업위원회의 허락이 있어야만 트럭들이 식료품을 운송할 수 있었다.
장기간의 대중파업은 식료품과 그 밖의 다른 필수적 서비스를 조직해야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현장조합원들이 발휘하는 주도력은 새로운 세력들을 투쟁에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형식적인 하루 파업조차 유용한 기회를 제공한다. 매우 형식적인 파업조차 일상을 깨는 ’사건’이다. 그것에도 동원, 선전, 집단적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한 파업도 많은 노동자들이 집단 행동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곤 한다. 그래서 사회주의 사상과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확대를 위한 새로운 기회도 된다.
서로 다른 대중파업 형태 사이에 만리장성 따위는 없다. 그것의 실제 발전은 활동가들이 파업을 어떻게 건설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현장조합원들의 주도력을 위해 투쟁하는가에 달려 있다.

[번역 김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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