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리스펙트의 분당 사태
최일붕
이 소론은 세계 급진좌파(사회민주주의 정당 왼쪽의 정치 단체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용어)의 위기 중 가장 최근 사례인 영국 리스펙트 ‘분당’ 사태에 대해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자 당 계간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자인 노(老) 혁명가 크리스 하먼이 설명한 글이다.
물론 리스펙트는 자신을 ‘정당’이 아니라 ‘단결 연합’(공동전선)으로 규정했으므로 ‘분당 사태’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당에서 출당당한 갤러웨이가 보기 좋게 국회의원에 재당선한 2005년 총선 결과를 보고 영국 매스컴이 “반전 정당 리스펙트의 선거 도전 성공”에 대해 보도했고, 유럽의 반신자유주의 “급진좌파 정당들”이 리스펙트를 자기들 중 하나로 꼽곤 하는 데서 보듯이, 좀 덜 엄밀한 용어법으로는 리스펙트를 정당이라고도 한다.
최근 한국판 “급진좌파 정당”인 민주노동당도 대선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내고부터 내홍이 더욱더 심각해져, 어쩌면 ‘리스펙트 혁신파’(이하 ‘혁신파’)처럼 분당론자들이 뛰쳐나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든다. 분명히 리스펙트 분당 사태에는 한국과는 다른 고유한 영국적 요소들이 있다. 하지만 유사한 요소들도 눈에 띈다. 총선을 앞두고 선거주의적 고려에 따른 기회주의적 주장들을 종파적 방식으로 개진하는 것이 그 중 하나다. “다원성, 포괄성, 광범성” 같은 좋은 가치들의 이름으로 실천은 개인주의적이고 제멋대로 무규율한 것도 닮았다.
위기의 근본 원인도 영국에서처럼(그러나 독일과 달리) 반전·반신자유주의 급진화가 계급투쟁 자신감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지연되고 있는 현실이다. 독일 좌파당과 달리 리스펙트에는 노동당 지지자였던 사람들이 상당수 합류하지 않고 있다는 구조적 약점이 있다. SWP는 이 약점을 극복하려고 노동조합 대회도 여는 등 무진 애를 썼지만, 총선을 앞두고 갤러웨이는 무슬림 표를 강조하는 대안적 총선 전략을 내놓은 셈이다.
리스펙트의 위기는 단지 영국만이 아닌 국제적 수준(프랑스,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포르투갈 등지)에서 급진정당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노동계급의 선진 대중이 ‘제3의 길’로부터는 단절했지만 사회민주주의 자체로부터는 아직 단절하지 않았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11월 초 〈맞불〉에 실린 리스펙트 위기 관련 알렉스 캘리니코스 칼럼은 국제적 관점에서 쓰여진 중요한 글이다. 캘리니코스는 혁명가들과 개량주의자들의 연합은 필요하지만 불가피하게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리스펙트 분당 사태의 본질은 리스펙트의 미래를 둘러싼 연합 내 좌우파 간 충돌이었다. 우파는 조지 갤러웨이와 살마 야쿱이 지도했다. 그들은 선거주의적 전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무슬림 공동체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이제는 아예 그 지역 유지들(기업인들)과도 연계를 맺으려 했다. 영국의 전통적인 인종적 ‘몰표’ 방식에 의존하려 하는 것이다.
좌파의 리더인 SWP는 무슬림의 지지를 받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갤러웨이와 야쿱이 만나는 새로운 동맹자들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제동을 걸려 했다. 2006년 시의회 선거 결과를 보고 주위에서는 리스펙트가 무슬림 정당이라고 비판했다. SWP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며 더 나아가 리스펙트가 더 넓은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갤러웨이와 야쿱은 이에 대해 비관적이다. 리스펙트가 반제국주의·반신자유주의 강령을 갖고는 더 광범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갤러웨이 등은 지난해 리스펙트 지지 노조 대회가 실패작으로, 공연한 자원 낭비였다고 비판했다.
갤러웨이는 지난해 8월부터 SWP를 분열시키려 했다. 갤러웨이를 지지하는 SWP 당원들을 동원해 SWP 내에 논쟁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당을 분열시키려 했다. 그래서 SWP는 두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리스펙트 내에서 갤러웨이와 싸우고 SWP 내에서 그의 지지자들과 싸워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저명한 영화감독 켄 로치와 제4인터내셔널 영국 지부인 ISG(International Socialist Group)가 갤러웨이의 ‘혁신파’에 가세했다. 이 가운데 특히 ISG는 모순되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줄곧 스코틀랜드사회당(이하 SSP) 모델을 지향해 온 그들은 그 길에 SWP가 장애물 노릇을 하고 있다고 보고 갤러웨이와 손을 잡은 건데, 갤러웨이도 SSP 모델을 지지하지는 않는다.(SSP 모델을 지지하는 민주노동당 의견그룹 ‘전진’ 소속 장석준 동지가 갤러웨이의 ‘혁신파’를 지지하는 글들에 동의하며 번역한 것은 모순된 일로, 반다함께·반SWP 정서가 앞선 면도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11월 리스펙트 대의원대회는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기존 대의원의 다수가 참석했고 비중 있게 전국공무원노조가 참가해 리스펙트 사수 입장이 옳았음을 보여 주었다.
같은 날 개최된 ‘혁신파’ 대의원대회는 이보다 작았다. 그러나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저명인사들은 다 그쪽에 있다(갤러웨이, 야쿱, 켄 로치 등). 또한 다수의 시의원들이 가세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자세히 묘사될 타워햄릿츠 사태가 보여 줬듯이, 갤러웨이와 살마 야쿱은 우경화하고 있다. 야쿱은 켄 리빙스턴과 가깝고 그 때문에 전에도 린지 저먼의 런던시장 선거 출마를 반대한 바 있다. 그러므로 내년 런던시 선거에서 논쟁이 있을 것이다. ‘혁신파’는 리스펙트가 선거에서 실적을 내는 것을 훼방놓으려 할 것이다. 내년 런던시 선거는 비례대표제가 있어서 리스펙트가 실적을 낼 수도 있건만 불행히도 ‘혁신파’의 방해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다.
‘혁신파’ 지도자들인 갤러웨이와 야쿱의 우경화는 그들이 중요한 정치 쟁점을 회피할 뿐 아니라 다루지도 못할 것임을 뜻한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 문제와 낙태 문제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내부에 정치적 이질성이 잠복하고 있으므로 내분이 일어날 수 있다. 물론 단기적으로 ‘혁신파’는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혁신파’의 활동가 기반은 소규모 단체인 ISG에 의존하고 있다. 갤러웨이와 야쿱이 ISG의 뜻에 쉽게 따라갈 리 없다. ISG보다 훨씬 더 크고 영향력도 더 큰 SWP의 뜻에도 따르지 않은 이들이 ISG의 뜻을 따를 리 없다.
SWP는 리스펙트를 통한 광범한 연합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 총리 고든 브라운은 노동당을 회생시키려 애쓰고 있지만 지지율은 전임 총리보다 낮다. 그래서 아직도 노동당 좌측의 정치세력들은 함께 좌파적 대안을 건설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정치적 공동전선을 건설하되, 기회주의자들이 언젠가는 떨어져나갈 수 있음에 대비한다는 종전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진보정당 건설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진보정당 건설은 자유주의적 포퓰리스트들의 정당이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면서 그 왼쪽에 공백이 형성되고 있는 조건을 전제하고 추진되고 있는 정책이다. 이 조건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가 얻어야 할 다른 중요한 교훈은 변혁 조직 유지의 중요성이다. 우리는 공동전선으로서 민주노동당 건설의 중요성과 함께 ‘다함께’ 건설의 중요성도 강조해 왔다. 그래서 정간물 발행뿐 아니라 회원 가입과 독자적 행동 등도 잊지 않았다. 변혁 조직 건설에 대한 이 같은 강조가 없다면 민주노동당 위기에 대처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 글의 번역은 이수현과 김용욱 동지들이, 용어 통일 등을 포함한 교정·교열은 나와 김하영이 맡았다. 특히 연말 각종 송년회 참가 요청도 외면하고 번역하느라 애쓴 두 동지들의 노고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