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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노태우 국가장 결정 규탄한다

2021년 10월 27일

1979년 10월 26일 선임 독재자 박정희가 심복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자, 전두환과 함께 독재 체제를 연장하려고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하고 광주에서 대량학살을 저지른 노태우가 사망했다.

그런데도 오늘(27일) 문재인 정부는 노태우를 위해 국가장을 치러 주기로 했다.

정부가 나서서 민주주의 파괴와 대량학살 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우파의 기를 살리는 것이고, 변화 염원 대중의 기억과 정의, 희망을 모욕하는 짓이다.

노태우와 그의 동지 전두환은 민주화의 열망을 총과 탱크로 짓밟고 피의 강물 위에서 정권을 잡은 자들이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발포 명령에 대한 진상을 자백하지도 않았고, 사과하지도 않았다.

문재인은 5·18 정신을 헌법에 넣겠다고 말했으나 결국 제스처였을 뿐이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말 레임덕을 막으려고 지배계급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코드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1997년 대선 직후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인의 강력한 건의로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해 준 일을 생각나게 한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나? 대기업 소유자들과 우파는 개과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기가 살아났고 세력을 공고히 했다.

“전두환과는 다르다”는 헛소리

송영길 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 등은 노태우가 전두환과 달리 민주화에 대해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고, 간접 사과도 했다며 전두환과 다르다는 식으로 말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차이 운운하는 이런 견해는 친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이 대체로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한겨레〉와 〈경향〉도 그런 취지로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전두환과 노태우는 신군부 권력 탈취 과정의 주역이었다. 당시에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듯이, 노태우 정부도 결코 ‘민주’ 정부가 아니었다.

신군부 일당은 박정희가 군부를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하려고 키운 그의 사냥개들이었다. 그들은 주인이 비명횡사하자 재빠르게 그 공백을 파고들어 권력을 잡고 새로운 군부 정권의 주인이 됐다.

그들이 첫 쿠데타를 감행한 1979년 12월 12일 전방에 있던 자기 휘하 병력을 서울로 이동시켜 쿠데타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 바로 노태우였다.

이후 노태우는 광주항쟁 진압 당시 계엄 확대를 주도했고,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서 대통령으로 직행하자 그 후임 보안사령관(기무사령부를 거쳐서 지금은 안보지원사령부로 이름이 바뀜)이 됐다.

군사 정권을 정당화하려고 올인한 1988년 서울올림픽의 조직위원장, 그리고 함께 만든 집권 민주정의당의 대표가 돼 전두환 정권의 2인자, 후계자로서 권력과 호사를 누렸다.

1987년 6월 항쟁의 규모와 전투성, 급진성에 밀리게 되자, 전두환과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포함한 6·29 선언을 노태우가 발표하도록 합의했다. 노태우가 차기 대선 후보로 나가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공안정국

노태우는 대통령 선거에서 “보통 사람들의 시대”라는 구호를 걸고 전두환과는 다른 듯이 보이려고 애썼다. 지금 자유주의 언론들은 1980년대 후반의 전국민 의료보험 확대 등 일부 개혁 조처들을 노태우의 업적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 특히 계급투쟁 때문에 강제된 양보였다. 1987년 6월항쟁, 7~8월 노동자 대파업 이후 노동자·학생 운동 등의 급진적 저항 물결이 4년 더 이어졌기 때문이다.

노태우는 잠깐의 유화책 이후 1989년 봄부터 강경한 공안 탄압에 의지했다. 그는 ‘임기 중 중간평가’ 공약을 간단히 뒤집었고, 1990년, 91년에도 ‘공안 정국’(보편적인 국가 탄압)을 전개했다. 1991년 5월에는 국가보안법 개정 쇼를 했지만, 오히려 처벌 범위를 넓히는 개악이었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현대중공업 파업을 진압하려고 경찰 1만 5000여 명을 육지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투입했다. 그 직후 전교조 창립대회에도 경찰을 투입해 참가자들을 전원 연행하고 1000명이 넘는 교사들을 해직시켰다. 리영희 선생 등 지식인들도 단지 정권 비판 글을 썼다는 이유로 다시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다. 심지어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작품으로 실천한 마광수 교수도 미풍양속을 해쳤다며 구속하고 교수직을 박탈했다.

이런 탄압도 모자라 1990년 1월에는 조직폭력을 핑계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또다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당시는 물가 인상과 전·월세 폭등 등 생활고로 인한 분노가 끓고 있을 때였다. 또한 보안사령부가 민간인을 사찰하고 있다는 내부자 고발도 터져나왔다. 헌병들이 M16으로 무장하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1991년 공안정국은 결국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을 독려했다. 일선 파출소에까지 M16 소총이 지급됐다. 결국 명지대 학생 강경대 열사, 성균관대 학생 김귀정 열사 등이 경찰 진압으로 사망하고, 서울대 대학원생 한국원 씨가 경찰이 시위 진압을 한답시고 쏜 총탄에 맞아 귀갓길에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저항을 막으려고 노태우 정부는 분신 자살한 김기설 열사의 유서가 대필 조작됐다는 희대의 조작 수사로 죄 없는 강기훈 씨에게 분신 사주라는 누명을 씌워 장기 옥살이를 시키고 대중의 저항을 무마하는 데 써먹었다.

대선이 치러진 1992년에도 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좌파 조직 파괴를 목표로 한 공안 탄압은 계속됐다. 국제사회주의자들(IS) 조직 사건으로 그해 2월 수십 명이 일거에 구속됐다. 사노맹, 계급해방 등도 탄압을 받았고, 그해 대선 국면에서 이선실 간첩 사건을 이용해 민족해방애국전선(“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탄압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북방 외교’라는 것도 소련 붕괴 후 미국이 옛 소련 지역과 중국 등을 미국 중심의 패권 질서에 편입시키려는 과정에 동참한 것일 뿐이다. 노태우는 탈군사독재 이후 최초로 미국을 돕는 해외 파병을 한 정부였다(1991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 당시는 ‘걸프전’이라고 불림).

노태우는 사돈 재벌인 SK와 유착했다. SK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자기 덩치보다 큰 대한석유공사를 넘겨받고 이동통신 사업권을 확보해 오늘날 다국적기업으로 자라날 기틀을 확보했다.

훗날 노태우가 재임 기간 조성한 불법 정치자금이 밝혀진 것만 5000억 원이 넘는다는 게 드러났다. 퇴임 이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자들이 차기 정부를 잡도록 하는 데 이런 돈을 쓰려했던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일부 공과가 있는 정부로 재평가될 정부가 아니다. 노태우와 전두환의 차이는 온건한 표정이냐 강경한 표정이냐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식 평가, 즉 ‘애초의 출발 과정은 나빴지만 그래도 개혁의 선의가 있었고, 김영삼, 김대중 등 민간 정부로 이행기의 과도 정부로서 역사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은 실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태우 정부에 맞서서 싸워 온 대중을 모욕하는 작태다.

2021년 10월 27일
노동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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