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총선 참패 여파에서 회복하기는커녕, 박근혜 정부의 정치 위기는 세상 물정을 조금만 아는 사람의 눈에도 확연하다. 전임 정부와 현 정부 둘 다 이리저리 관련돼 있는 대우조선 비리 스캔들, 우병우 스캔들, 나라 안팎에서 거세게 부는 사드 배치 결정 후폭풍,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의 공장 사수 투쟁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저항, 이화여대 학생들의 대학 구조조정 반대 점거 투쟁 등은 박근혜가 겪고 있는 정치 위기의 최신 징후들이다. 이런 갈등들의 근저에는 경제 위기가 자리잡고 있어 박근혜 정부는 회복이 쉽지 않은 유기적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의 분열이 그렇게 공공연하고 격렬한 까닭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대선에서 정권을 잃겠다 싶은 범여권의 위기의식이 큰 탓이다.
반면,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의 좀스러움과 졸렬함은 눈뜨고 봐줄 수가 없다. 8월 12일 더민주당·국민의당이 새누리당과 한 합의 — 두 야당은 세월호 특조위 활동 기간 연장,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 사건 청문회 등을 제외시킨 채 추경 예산안을 처리하기로 새누리당과 합의했다 — 는 두 자본주의 야당의 비굴함과 반동성을 여지없이 보여 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언제까지 노골적인 자본주의 정당들이 설치는 제도권 정치를 지켜 봐야 하냐며 진저리를 낸다. 그들 중에는 진보 정당이 주요 야당으로 성장해 의회에서 노동자들을 대변해 개혁을 해 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자본주의 정당들에 도전하는 실로 중요한 방식은 노동현장과 거리 그리고 대학교에서 노동자들과 평범한 사람들이 벌이는 집단적 저항이다. 갑을오토텍, 성주, 이화여대에서 전개되는 투쟁들이 참으로 값지다. 이 투쟁들은 총선 민심을 정면으로 역행하는 박근혜에 대한 불만의 초점을 제공해 준다. 이 투쟁들이 승리하고 다른 곳으로 투쟁이 확대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투쟁하지는 않으므로, 비혁명적 시기에 변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대개 진보 정당을 자본주의 정당의 대안으로 여기기 쉽다. 4월 총선 이후 연합 정당 프로젝트를 가동시키려는 움직임도 그런 경우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다양한 진보·좌파 정치 조직들이 연합해 새로운 진보 정당을 만들어 자본주의 정당들이 설치는 기성 정치권에 도전하는 것이다. 역사적·국제적 경험을 봐도, 제도권 정치 영역에서 노골적인 자본주의 정당들만이 판치는 것보다 노동계 정당이 진출하는 것이 노동자 운동(과 혁명적 좌파)에 유리하다. 두 제국주의 정당 — 공화당과 민주당 — 이 제도권 정치를 독점하는 미국 정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연합 정당 프로젝트의 필요성은 분명하다.
물론 한국 노동자들이 노동자 진보 정당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중반 민주노동당의 현란한 성장을 보며 환희해 보기도 했고, 두 번에 걸친 쓰라린 분열도 경험해 봤다. 그래서 연합 정당 프로젝트는 필요성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연합을 위한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서 민주노총 중심의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 뜨거운 쟁점이다. 역사적으로도 영국 노동당, 브라질 노동자당(PT), 한국 민주노동당 등이 노동조합이 주도해 건설한 정당들이다. 이 정당들은 처음에 급진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개혁주의 틀 안에 있었다. 그렇다고 이 정당들이 개혁주의일 뿐이라며 초좌파적으로 일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지금 민주노총 안에는 정치적 차이들이 존재한다. 계급의식이 불균등하게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노총 안에 진보·좌파 정당들이 여럿 존재한다. 이때 정치적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고 민주노총이 주도해 단일한 정당을 건설하자고 밀어붙인다면 엄청난 분란을 낳을 것이다. ‘무조건 단결’을 앞세운다고 해서 광범한 단결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2017년 진보대통합 당을 만들자는 견해는 아주 우려스럽다. 정당 지지 문제로 노동조합이 분열해 단결력과 투쟁력이 약화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히려 선거 시기에 노동계급의 단결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선거연합정당이다. 평소에는 진보·좌파 다원주의에 입각하면서도, 사안별로 괜찮은 입장을 취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신축성을 발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소책자 1부에 실린 두 글은 이 부분을 다룬다. 통합진보당 분열로 정의당(사회민주주의 세력)과 자민통계(스탈린주의 세력)가 역사적으로 분화한 정치 조건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검토하며 지속 가능한 연합의 조건으로 선거연합정당 안을 제안한다. 또, 자민통계가 민주노총 정치 방침으로 채택하고 싶어 하는 진보대통합당 안에 담긴 그들의 정치 전략, 내년 대선 방침을 둘러싼 논점을 살펴본다.
2부는 정의당을 다룬다. 정의당이 지난 4월 총선에서 꽤 소득을 거두면서, 그 당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 논쟁이 되고 있다. 2부에 실린 글들은 정의당의 등장과 성장 요인을 계급투쟁의 맥락에서 검토하고, 정의당이 한국 정치 지형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정의당의 물질적 토대를 논의한다. 그리고 고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사회민주주의와 민중주의를 분석함으로써 정의당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제공한다.
3부는 진보정당과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각각 지향하는 전략 — 국가 공직을 장악해 개혁입법을 추진하는 것과 혁명을 통해 노동계급이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 — 의 차이점과 그에 상응하는 조직 형태의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혁명 이전부터 사회주의 정당 건설에 착수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끝으로, 4월 총선 결과를 분석한 글을 부록으로 실었다.
이 소책자에 실린 글들은 최일붕과 김인식이 <노동자 연대>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약간만 손보고(내용상 변화는 없다) 독자들이 읽기 쉽게 주제별 분류를 한 것이다.
모쪼록 이 소책자가 변화한 정치 상황에 맞는 실천적 대처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016년 8월 18일
김인식(공저자를 대표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