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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게재 전공의 파업을 계기로 살펴본다:
전문직은 특정 계급인가?

[편집자 주] 전공의들이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에 반대해 파업에 나선 지 한 달이 넘었다. 이와 관련해 여러 쟁점들이 제기되는데, 그중에는 의사의 계급적 지위 문제도 있다.

이 글은 2020년 전공의 파업 당시 쓴 것으로, 지금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재게재한다.

최근 전공의 파업 문제를 다루면서 본지가 전공의를 노동계급의 일부라고 본 것에(물론 전공의 파업의 요구들은 부적절했다) 일부 독자들은 의아해 했던 듯하다. ‘의사는 중간계급 아닌가?’ ‘앞날이 창창한 그들이 무슨 노동계급이라는 말인가?’

직업에 따라 계급 위치가 정해진다는 오해가 매우 널리 퍼져 있다. 어떤 직업은 소득이 어떻고, 어떤 직업은 교육수준(특히 자격증)이 어떻고, 어떤 직업은 사회적 지위가 어떻고 하는 식이다. 이는 특정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기회라는 측면에서 계급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생산수단과 맺는 관계에 따라 계급이 규정된다고 했다. 생산수단을 소유(또는 지배)하는가 아닌가, 착취 과정에서 하는 구실은 무엇인가(착취하는 사람인가 착취 당하는 사람인가),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는가 통제 당하는가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는 것이다.

직업을 기준으로 계급을 규정하는 (사회학적) 방식은 직업 내에 위계가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계급 경계는 직업 간에 있지 않고 직업 내에 있다. 예를 들어, 교사의 대부분은 노동계급이지만, 교사 집단 위계의 상층에는 학교 경영에 관여하고 보통의 교사들을 관리하는 구실을 하는 교장 같은 (신)중간계급이 있다.

교사라는 직업을 기준으로 그들 모두를 하나의 계급으로 취급한다면 계급 간 차이를 흐리는 효과를 낼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교사들이 유사한 종류의 훈련을 받고, 자격증을 따고, 동일한 경력 구조의 구성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평교사들은 위계 구조의 상층에 있는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다. 아주 좁은 길이지만 승진의 기회는 그런 효과를 자극한다.

이번 전공의 파업의 요구를 보면, 그들은 의사라는 직업 위계 구조의 말단인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기보다는(이런 요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미래에 그들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선임 의사들의 이해관계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하지만 평교사나 전공의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들의 계급적 위치가 지금 달라진 것은 아니다. 계급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느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생산관계에서 객관적으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직업이나 의식이 아니라 생산수단과 맺는 객관적 관계에 따라 계급을 정의해야 한다 ⓒ출처 대구가톨릭병원

변화

직업의 구체적 특징에 기초해 계급을 나누는 방식에는 다른 문제점도 있다. 어떤 직업이 생기고 사라지거나 그 위상이 변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전혀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문직이나 관리직이라고 부르는 일자리가 크게 증가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 당시 다방면에서 관리자가 늘었고, 교사, 교수, 의사, 변호사처럼 선진 자본주의 체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전문직이 늘었다.

그러자 많은 사회학자들은 이들을 다른 노동자들보다 높은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새로운 계급’(노동계급과는 별개인)으로 규정했다. 가령 미국의 유명한 급진 사회학자인 C 라이트 밀스가 대표적이다. 그는 경영직, 사무직, 전문직 등을 한데 아울러 “화이트칼라”라고 불렀다.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만을 노동계급으로 보면서 그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관점은 툭하면 노동계급이 사라졌다거나, 노동계급이 줄어들고 중간계급이 다수인 사회가 됐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역동적 체제인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노동력을 양산하고 체제의 필요에 맞게 재편한다. 옛 직업을 파괴하고, 새 직업을 만들고, 특정 노동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가령 교직이나 은행이나 보건 업무가 50년 전과 똑같다고 본다면 오산이다. 그 역할과 지위는 계속 변해 왔다. 아무리 전문 분야라도 자본은 그 전문성을 자본주의 생산의 특징인 모종의 합리화에 종속시킨다. 내부 경쟁 체제 도입, 인원 삭감, 학교나 병원의 시장화 등이 그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화이트칼라’ 전문직 종사자의 다수는 임금, 노동조건,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 결여 등 모든 측면에서 전통적 노동자와 본질적으로 같은 특징을 보인다. 점점 노동계급화해 온 것이다.

교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의 임금 수준은 다른 노동자들과 비교해 그렇게 높은 수준이 못 된다. 수량화하기 힘든 이들의 업무조차 평가 대상이 되면서 업무 보람을 느꼈던 요인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물론 변화가 이런 방향으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가령 대학에서 대다수 강사·교수의 조건이 하락하는 동안, 극소수는 대학 경영과 관리에 긴밀하게 관여하게 되면서 상층 중간계급의 일부가 돼 높은 연봉과 특혜를 누리게 됐다.

전에 교사나 다른 전문직 피고용인들이 겪었던 변화 과정을 이제 의사들이 뒤따르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개업의가 소폭 줄어든 한편, 취업 의사(봉직의)는 늘어났다. 취업 의사 가운데 전공의는 최말단을 이루며 연봉 4000~6000만 원이라는 그리 높지 않은 임금에 주당 80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에 내몰린다. 미래에 그들이 어떤 직급에 오르든 현재 그들의 처지는 다른 노동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요즘은 계급이 사회의 근본적 분단선이라는 생각이 좌파 내에서도 흐릿해지고 있다. 대신 성별과 인종 같은 정체성이나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하는 고용 형태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다뤄지기도 한다. 계급은 한물 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전문직 종사자 다수의 노동계급화와 그에 따른 집단행동은 노동계급의 여전한 중요성을 보여 준다. 노동계급이 사라지기는커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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