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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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민족문제
가레스 젠킨스

2006년 12월 4일

소련 전체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지만 소련의 해체는 후퇴라고 말한다. 가레스 젠킨스는 레닌이라면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레닌의 민족 자결권 이론의 핵심은 제국주의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였다. 볼셰비키는 민족주의에 철저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억압 국가의 소수 민족과 피식민지인들에 대한억압 국가의 민족주의와 피억압자의 민족주의를 명확하게 구별했다.

사회주의자들은 피억압자의 민족주의가 노동 계급의 적인 억압자의 국가에 도전한다면, 그것을 지지할 의무가 있다. 설사 민족주의자들의 방식이 노동자 운동의 방식과 상당한 거리가 있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피억압 민족 투쟁에 대한 지지는 분리할 권리, 피억압 민족이 원하는 국가를 수립할 권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를 포함한다. 분리권을 동의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더 강력한 국가와의 실질적인 평등을 배제하는 것이다. 실질적인 평등은 자기 민족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포함한다.

민족자결권에 대한 레닌의 지지는 그의 노동자 국제주의와 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주장은 상호 보족 관계였다. 만약 민족 반란이 성공한다면, 기존 세계 질서, 즉 제국주의 체제가 약화될 것이다. 또, 국제 노동 계급의 단결은 민족들 간의 진정한 평등에 바탕할 때만 가능하다.

자결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를 인정한다면 피억압자 대중에 대한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지위 때문에 자결권 문제에서 일관되지 못하다.

물론, 분리 없이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다면 훨씬 나을 것이다.(그래서 레닌은 사회주의자들이 분리권을 지지해야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것을 반드시 옹호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레닌에 대한 ‘좌익’ 비판자들처럼 이 과정을 건너뛰려는 모든 시도, 특히 국제 혁명이 민족 자결권을 쓸모 없게 만들었다는 주장에는 그런 실천의 목표[국제 혁명] 자체를 좌초시킬 수 있는 위험이 뒤따랐다. 노동자 국제주의의 이름으로 자결권을 부정하는 것은 피억압 대중들에게는 부르주아적 ‘국민 통합[통일]’의 이름으로 자결권을 부정하는 것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레닌은 노동자 국가조차 그 내의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노동자 국가가 여러 독립 공화국들로 나뉘게 될지라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1917년 말에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의 국경이 어디를 통과하는지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노동자들이 모든 민족의 부르주아들과 계속 투쟁하는 것이다.”

레닌이 주장했듯이, 사회주의자들은 일반으로 큰 국가를 선호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지에 따라 평가받는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와는 달리, 사회주의자들은 노동 계급의 국제 연대를 중요하게 여긴다. 만약 국가의 분리를 통해 국제 연대를 이룰 수 있다면 그 역시 좋다. 민족 간의 진정한 평등이 나타난다면 큰 국가로의 자발적 통일이 – 거기에서 오는 이점과 함께 – 시작될 것이다.

볼셰비키는 자신이 물려받은 짜르 제국에 이 이론을 적용하려 했다. 볼셰비키가 처한 끔찍한 조건 때문에 그 이론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먼저 제1차세계대전과 내전(1920년까지 지속된) 때문에 나라는 경제적·행정적 혼란에 빠졌다.

후진적이고 황폐화된 나라의 생존 문제는 국제 혁명의 전망이 사라지고, 노동 계급의 해체로 국가와 당에서 관료주의적 경향이 점차 강해지면서 더 악화됐다.

러시아 혁명으로 해방된 영토는 아주 다양했다. 세계 대전으로 비러시아 영토를 빼앗긴 뒤에도, 지배적인 대러시아 구성원은 전체 인구의 절반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3천만 명이었고, 백러시아인들이 4백50만 명이었다. 그 외에 3천만 명의 비슬라브계인들이 있었는 데, 그들은 수가 작은(그 중 가장 큰 집단인 우즈벡인들도 5백만 명에 불과했다)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됐고, 유목 부족부터 상업 자본주의까지 인류 발전의 모든 단계를 포함했다.

세계대전은 이런 민족들을 묶어 주던 끈을 약화시켰다. 많은 지역이 사실상 독립했다. 따라서 문제는 독립을 부여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통치해야 하느냐였다.

문제는 또 있었다. 혁명의 중심지는 노동자와 볼셰비키의 힘이 가장 강했던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였다. 이 도시들은 또한 대러시아인들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혁명의 운명이 지배적인 민족 집단의 운명과 동일시될 위험이 있었다.

레닌은 이런 위험을 깨달았고 있는 힘을 다해 이것과 싸웠다. 그는 제8차 전당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의 속을 계속 파다 보면 대러시아 국수주의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변화와 부분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의 초기 성취는 인상적이었고, 확실히 사회민주주의 전통보다는 백 배 나았다. 사회민주주의 전통은 실천에서 번번이 제국주의적 억압과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짜르 통치 아래에서 가장 ‘발전된’ 피억압 국가는 폴란드·핀란드·우크라이나였다. 볼셰비키는 그들의 완전한 독립권을 인정했다(임시정부는 이 문제를 회피했다). 10월 혁명 직후인 1917년 12월에 핀란드는 독립 국가가 됐다. 폴란드는 독일 점령 아래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볼셰비키는 폴란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발트 해 국가들도 독일 점령이 종식되고 영국의 압력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붕괴된 1920년에 부르주아 독립 정부를 인정받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사태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는데, 분리에서 통합으로 나아갔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기 전에 라다라고 불리는 자치 공화국이 수립됐다. 라다의 중간 계급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2월 혁명의 정신에는 동의했지만 국제 사회주의 혁명에는 적대적이었다.

1918년 1~2월 동안 라다가 전복되고 새로운 소비에트가 형성됐다. 이것은 자결권을 위배한 것이었을까?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에 자신이 싫어하는 정부가 있다고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을까?

사실 라다가 붕괴한 가장 핵심적 이유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진정한 독립을 위해 일관되게 투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편으로 넘어갔다.

라다는 스스로 제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했고, 이것은 3주 후 라다가 독일의 도움으로 다시 구성된 후 결국 꼭두각시 정부로 대체된 점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라다는 독일의 이해관계에 완전히 순종했기 때문에 1918년 11월 독일이 몰락하면서 함께 몰락했다.

가장 중요하게, 신생 소비에트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유기적인 기반를 가지고 있었다. 라다는 대중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1918년 초에 라다의 한 지도자는 “우크라이나인 대다수는 우리를 반대한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특히 산업 중심지의 노동자평의회들이 신생 소비에트 정부의 기반이 됐다. 1919년 2월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가 부활했을 때, 키에프 사람들은 이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처음에 볼셰비키를 대러시아 국외자로 의심했던 우크라이나 대중은 독립 운동에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외국 제국주의나 백군 치하의 ‘독립’ 경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제국주의나 백군 중 어느 누구도 사람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개혁을 가져다 줄 수 없었다. 볼셰비키 하에서 그들의 삶은 개선됐다. 대다수 대중은 러시아와의 통일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우크라이나에서 민족 억압에 맞선 볼셰비키의 마지막 투쟁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의 지역 소비에트는 산업 중심지의 노동자들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노동자들과 지도적 볼셰비키 중 다수는 대러시아인이었다. 볼셰비키 통치가 대러시아의 지배로 이어졌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레닌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열망을 충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막대기를 구부렸다. 그는 모든 관리들이 우크라이나어로 말해야 하고, 우크라이나 농민들과 경제적·정치적으로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제안은 많은 부분 옳았지만, 국내외 계급의 적(우크라이나는 1919년 데니켄 장군이 지휘하는 백군의 공격과 1920년 폴란드의 침략으로 계속 혼란을 겪었다)을 진압할 필요 때문에 온전히 적용될 수 없었다.

민족 억압의 위험에 대처하려는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루지야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 민족들보다 카프카스의 민족들의 요구를 해결하는 데 크게 애를 먹었다. 이 지역에는 다양한 발전 단계와 다양한 종교를 가진(무슬림과 여러 종류의 기독교), 그리고 뚜렷한 경계에 따라 영토가 나뉘지 않는 많은 집단이 살고 있었다.

여덟 개의 토착 민족 집단들 중 가장 큰 것은 그루지야인·아르메니아인·아제르바이잔인(각각 2백만 명 이하)이었다. 기독교계 그루지야와 무슬림계 아제르바이잔에는 봉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아제르바이잔에 위치한 이 지역 최대 도시 바쿠의 석유 산업 때문에 많은 노동자 계급이 형성됐고, 이들 중 다수는 러시아인이었다.

이런 불균등한 경제 발전뿐 아니라, 짜르의 제국은 러시아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민족 억압과 카프카스 민족들 간 경쟁 관계를 정교하게 구성했다.

다른 곳에서처럼, 1917년 2월 혁명 이후 모스크바의 통제가 사라지면서 자치 운동이 등장했다. 그 해 11월에 카프카스에서는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하고 잘 조직된 그루지야인들이 주도하는 ‘트랜스코카시아 혁명 민주주의’가 성립됐다. ‘트랜스코카시아 혁명 민주주의’는 소비에트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볼셰비키는 오직 바쿠의 러시아인과 아르메니아인 사이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고, 독일의 동맹인 터키의 침략 위협이 제기되면서 경쟁 민족들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그 해 5월에 트랜스코카시아 공화국은 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세 개의 공화국으로 분열했다.

몇 주 뒤 터키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을 합병했다. 그루지야는 다른 두 공화국보다는 훨씬 강했지만, 동일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일종의 독일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6월에 멘셰비키 지도자 조르다니아가 그루지야 정부의 지도자가 됐다(그루지야는 멘 셰비키의 아성이었다).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영국군이 독일군의 지위를 차지했지만, 1919년 말에 영국군도 철군하면서 이런 소규모 공화국들의 미래가 불확실해졌다. 1920년 4월 바쿠에서 볼셰비키가 봉기를 일으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가 등장했다. 그 직후에 아르메니아 소비에트가 수립되면서 터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지 못했다.

그루지야에서는 민족 문제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발트 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볼셰비키는 1920년 5월에 부르주아 그루지야 공화국을 인정했다. 하지만 9개월 안에 소비에트 군대는 그루지야를 침공해 지역 볼셰비키 당원과 함께 그루지야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했다.

소비에트 군대는 광범한 대중적 저항에 부딪혔고, 모스크바로부터 온 지도자들, 특히 오르조니낏제(그루지야인이었다)는 오만하게 행동했다. 이런 행동에 심지어 그루지야 볼셰비키 당원들도 거북함을 느꼈다.

민족 문제 인민위원이었던 스탈린(역시 그루지야인이었다)이 소비에트 군대의 침공에 책임이 있었고, 그는 벌써 정치적 수단을 관료적 수단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던 레닌은 크게 우려했고, 그루지야에서 상당한 타협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루지야 지식인과 소상인 들에게 양보하고, 심지어는 전 멘셰비키 지도자인 조르다니아와 동맹을 맺으라고 오르조니낏제에게 요구했다.

그루지야 문제는 1922년에 갈 때까지 갔다. 스탈린과 오르조니낏제는 경제 통합이 가져올 이익 때문에 트랜스코카시스 공화국이라는 옛 구상을 지지했다. 그루지야 볼셰비키들은 자결권에 반한다는 이유로 이것에 반대했다. 당시 병세가 심각했던 레닌은 대체적으로 트랜스코카시스 구상을 지지했다.

레닌은 이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대러시아적 공갈 협박이 사용됐는지 알게 된 다음에(오르조니낏제는 한 지도적인 그루지야 볼셰비키 당원을 때리기까지 했다) 입장을 바꿨다. 그는 그루지야인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알렸고, 죽기 직전에 쓴 메모에서 볼셰비키 민족 정책의 타락과 그 과정에서 스탈린이 한 구실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그는 ‘연방’의 필요성은 짜르 체제로부터 물려받은 일부 국가 기구에서 생겨났고 여기에 “약간의 소비에트 기름을 발랐다”고 지적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방으로부터 분리할 자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러시아 인간 쓰레기들”로부터의 보호책은 전혀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스탈린의 “경솔함”, “노골적인 통치에 대한 집착”과 “민족 자결적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을 비판했다.

그는 “비러시아인들이 노동자 계급투쟁에 최대의 신뢰를 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뢰는 단순한 형식적 평등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다. “비러시아인들의 신뢰 부족, 의심, 그들이 과거에 ‘지배’ 민족의 정부로부터 겪었던 모욕을 보상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레닌의 마지막 투쟁이었고, 스탈린의 점증하는 영향력을 겨냥했지만 마비와 죽음 때문에 중단됐다. 그는 스탈린의 지도 아래 이제 막 탄생할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속임수가 아니라 되도록 진정한 연방으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의 계획은 다양한 민족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평등한 연방을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혁명 자체가 스탈린에 의해 질식됐기 때문에 실패했다.

비록 실수도 있었지만, 당시까지 볼셰비키의 정책은 러시아의 다양한 민족들 간의 평등을 촉진하는 데서 상당한 성취를 거두었다. 사실 소수 민족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와 일정 정도 동일한 이해 관계를 가진다고 믿지 않았다면 소비에트 러시아는 내전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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