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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말하는 무하마드 만평 사태
혐오감을 부추길 자유?

2006년 12월 4일

혐오감을 부추길 자유?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무하마드 풍자만화 사태가 이슬람 혐오의 증대를 보여 준다고 말한다

갑자기 언론의 자유가 핵심 정치 의제로 떠올랐다. 이것은 무엇보다 덴마크 일간지 <율란트-포스텐>이 처음 실은, 예언자 무하마드를 모욕적으로 묘사한 만평을 유럽의 많은 우익 언론들이 다시 게재하면서 촉발된 (무슬림들의) 항의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 문제는 영국 나찌 정당 BNP(영국 국민당)의 지도자인 닉 그리핀과 마크 콜렛의 재판에서 핵심 쟁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슬람을 "사악한 신앙"이라고 말하고 난민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해 선동죄 혐의로 구속됐다가 지난주에 풀려났다.
이 판결은 ’종교적 증오에 관한 법률’을 반대하는 좌파들이 완전히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들은 최근 기독교도·시크교도·유대교도들이 종교적 편협함과 종교적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보호받는 것처럼 무슬림들도 보호받을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기존 법률로도 심각한 사건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핀과 콜렛을 옹호하는 주장의 핵심은 그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비판했지, 인종적 이유로 무슬림들을 공격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들이 현행법 ― 인종적 혐오를 부추기는 것을 범죄로 규정한 ― 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그럴싸한 구분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서방 세계에서 이슬람 혐오가 인종차별의 가장 뚜렷하고 또 "유력한" 형태가 됐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압도 다수가 아프리카·아시아·중동계인 무슬림들은 역사적으로 영국에서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에서 흑인들이 당한 수치와 굴욕에 시달린다.
무하마드 풍자만화 사태는 이것을 매우 분명히 보여 준다. 덴마크 정부는 십중팔구 유럽에서 가장 우익적인 정부일 것이다.
덴마크 총리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은 이민자들을 끔찍하게 적대하는 덴마크 국민당의 지지 덕분에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또, 덴마크는 이라크 파병국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율란트-포스텐>이 무슬림을 이중으로 모욕하는 ― 무하마드를 묘사하고 그를 테러리즘과 결부시킨 ― 만평을 실어 "논쟁을 촉발하기로" 결심했다. 포그는 이 만평에 항의하는 아랍계 대사들의 면담 요구를 거부했다.
며칠 전 라디오 방송에서 어떤 바보가 말한 것과는 달리 이슬람이 모든 성상을 금지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민음사, 2004]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16세기와 17세기 서부 아시아를 지배한 이슬람 대제국들 오스만·사파위·무굴 제국 이 매우 풍부한 미술 전통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그림들 속에서 예언자 무하마드의 얼굴은 언제나 공백이었다. <율란트-포스텐>이 묘사한 것처럼, 터번 안에 폭탄을 담은 무하마드의 얼굴 전체를 그린 것은 무슬림들에게 직접적인 모욕이었다.

제한이 없다?

지난주 이 만평을 다시 게재한 독일의 <디 벨트>, 프랑스의 <프랑스 수아르> 같은 신문들은 언론의 자유가 "절대적" 가치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주장들이다.
만일 표현의 자유에 제한이 없다면, 신문이 1면에 아동 포르노를 실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이런 일을 하면 신문이 기소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인가? 물론 이 두 질문의 정답은 모두 "아니오"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거기에 제한이 있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다.
미국의 연방 대법원이 발전시킨 ’전투적 발언’ 이론을 보면,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치안 방해를 부추기는" 발언은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 권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라면 그리핀 같은 파시스트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보장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인종차별적 선전은 단지 견해를 표명하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논평가들은 이번 사태를 1988년 살만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문학세계사, 2001년]가 촉발한 소동에 비유한다. 이 소설에서 루시디는 이슬람의 기원에 관한 가공적이고 대안적인 역사를 표현했다.
이 책은 무슬림들 사이에서 ― 영국에 거주하는 많은 무슬림들을 포함해 ―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이란 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루시디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판결(파트와)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악마의 시≫와 무하마드 풍자만화는 비슷한 점이 전혀 없다. 무하마드 풍자만화가 무슬림을 모욕하는 노골적 기도라면, 루시디의 소설은 자신의 모태 신앙의 뿌리를 찾으려는 인도 출신 무슬림 작가가 창작한 복잡한 예술 작품이다.
<소셜리스트 워커>는 당시 루시디의 ≪악마의 시≫ 출판 권리를 옹호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소설이 영국과 그 밖의 서방 사회에 거주하는 무슬림들 사이에 불러일으킨 진정한 분노와 상처를 이해했다.
≪악마의 시≫가 옳든 그르든, 그 소설은 무슬림들이 겪었고 지금도 계속 겪고 있는 굴욕과 차별을 상징하게 됐다.
루시디 사건은 서방의 많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이슬람을 현대의 민주적·과학적 관행에 맞지 않는, 독특하게 암울하고 야만적인 종교로 묘사하는 캠페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것이 오늘날 이슬람 혐오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
이런 지식인들 가운데 다수는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이 유럽을 기독교 신앙에서 해방시킨 역사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조운 스미스는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충돌은 문명들 사이의 충돌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의 위상에 관한 계몽주의 이전 사상과 이후 사상 사이의 충돌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궁극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오랜 편견을 재연케 한다. 이런 편견은 이슬람의 복합성과 이슬람이 지배적 종교였던 많은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풍부함을 완전히 무시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유럽이 스스로 "기독교권"을 자처하며 선진 이슬람 국가들을 위험한 경쟁자로 인식했던 시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 이들은 프랑스 계몽주의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볼테르의 말년과 그가 가톨릭 교회에 맞서 펼친 운동을 많이 인용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에는 비슷한 점이 전혀 없다.
18세기에 서로 다른 기독교 교회들, 즉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다양한 유럽 왕조들의 공식 종교였다.
그 교회들은 이데올로기를 독점했고,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다른 기독교 종파 구성원들을 끔찍하게 탄압했다. 볼테르가 그랬듯이, 교회에 도전하려면 진정한 용기가 필요했다.
오늘날 유럽에서 이슬람은 구조적 차별과 편견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소수의 종교다.
예컨대, 영국의 무슬림들은 모든 사회경제 지표에서 최하층을 차지한다. 네덜란드 의원 아얀 히르시 알리 같은 반무슬림 활동가들은 결코 용감한 영웅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괴롭히는 국가의 옹호자일 뿐이다.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유럽 정부들은 무슬림들에 대해 억압과 통합을 동시에 추진하는 양면 전략을 사용해 왔다. 북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억압 ―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위협 ― 이 우세한 경향이다.

위협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이런 정책의 전형을 보여 준다. 무슬림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을 금지한 프랑스의 법률도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2월 5일치 <옵서버>를 보면, 독일에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州) 정부를 운영하는 기독교민주당은 ’무슬림’ 테스트를 채택했다. 이 테스트는 독일 시민권을 신청한 무슬림들에게 9·11 테러와 동성애에 대한 견해, 그리고 그들의 자녀가 수영 강좌를 들을 수 있게 허용할 것인지 등을 묻는다." 자유주의의 가치관 얘기는 이제 그만해라.
반면에, 영국 정부는 조금 다른 전략을 추구한다. 이들은 무하마드 풍자만화를 다시 게재한 것을 즉각 비난했다.
지난 7·7 런던 테러 이후 신노동당 정부는 무슬림 지도자들을 달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했다. 정부의 위협은 시민적 자유를 더 억압할 뿐 아니라 무슬림 지역사회가 "테러리즘을 비난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형태를 취한다. 여기서 "테러리즘"은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저항 형태 일체를 포함하는 데까지 확대된다.
그러나 정부는 무슬림 지도자들과 협상도 한다. 만일 이들이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낮추면 그 대가로 더 많은 공식적 자문과 인정을 주겠다는 것이다.
논쟁적인 무슬림 신학자인 타리크 라마단은 유럽 대륙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이데올로그라고 널리 비난받는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정부 자문으로서 그는 무슬림들이 더 넓은 사회와 "어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런던 시장 켄 리빙스턴도 영국 무슬림 지도자들을 굴복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리빙스턴은 2년 전 노동당에 다시 입당했음에도, 그가 무슬림 지역사회의 큰 신뢰를 받고 있는 이유는 인종차별 반대 경력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지하고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소규모 급진 이슬람 단체들이 런던의 덴마크 대사관 밖에서 벌인 시위를 비난하는 언론의 압력 때문에, 무슬림 지도자들은 자살폭탄 공격자들과 관계를 끊어야 하고 정부에 결코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은 영국과 유럽의 좌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권력 집단들이 무슬림들에게 제시하는 주요 선택들 ― 침묵, 억압, 또는 이슬람 테러리즘의 종말 ― 외에도 대안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은 우리의 과제다.
특히 이것은 우리가 이슬람 혐오를 거부해야 하고, 최근 벌어지는 언론의 자유에 관한 엉터리 주장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주의자라면 마땅히 억압과 착취의 진정한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그들과 함께 어깨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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