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조사] 故 조성민 동지를 떠나보내며
변혁에 대한 그의 신념을 이어 나가자

2012년 1월 1일

2012년 새해 첫날 새벽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 들었다. 다함께 활동가 조성민 동지가 42세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조성민 동지는 ‘한미FTA 날치기 무효ㆍ디도스 테러 한나라당 해체’ 촛불대회가 끝나고 동지들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변을 당했다. 현재 조성민 동지와 함께 그 사고를 경험한 동지들은 심각한 충격과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아는 다함께 회원들 모두 큰 슬픔에 빠져 있다. 아직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이 그의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몰랐다. 그 특유의 농담과 명쾌한 주장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조성민 동지의 가족, 친척,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애도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조예도 깊었다. 얼마 전 송년회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멋지게 연주하며 행복해 하던 조성민 동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는 매년 열리는 맑시즘 행사에서 음향과 기술을 담당해 궂은 일을 마다않는 등 다재다능했고 사회변혁 활동에 헌신적이었다.

△집회에서 연설을 하던 故 조성민 동지의 생전 모습.

조성민 동지는 변혁 운동에 기여한 바가 많은 혁명가였다. 1990년에 대학에 입학한 그는 일찌감치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곧 급진적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투쟁에 대한 헌신성과 재능을 보여 주며 동지들의 지지를 받았고, 1996년에는 한양대 총학생회 사무국장으로서 운동에 기여했다.

당시 좌파 학생단체였던 전국학생정치연합의 주도적 활동가였던 조성민 동지는 1997년에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공안기관의 탄압을 받아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성민 동지는 이런 탄압 속에서도 혁명적 신념을 꺾기는커녕, 더욱 더 단단해졌다. 당시 일부 사람들이 실용주의적 태도로 국가 탄압에 타협한 것과 달리, 그는 법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밝히며 투쟁했다.

옛 소련 몰락의 충격 속에 많은 활동가들이 개혁주의적 대안으로 후퇴하던 상황에서도, 그는 모든 불의가 사라진 인간이 해방되는 사회를 위한 대안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했고 답을 찾아 나갔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부터 그는 미국식 시장자본주의와 옛 소련식 국가자본주의 모두에 반대하는 국제사회주의자로서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 신념을 포기한 바가 없다.

그는 2000년대 초반의 다함께 건설 과정에서도 주도적이었고, 당시 반전 운동이나 노동자 투쟁에 대한 연대에서도 앞장섰다. 그는 민주노동당 성장 과정에 개입하며 좌파적 목소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2002년에 그는 민주노동당 서울 중랑지구당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이런 과제를 수행했다.

그 후에도 그는 온갖 역경과 시련 속에서 가끔 힘겨워 하기도 했지만, 결코 혁명가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친지들의 반대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조성민 동지는 특히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그와 함께 활동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명민하고 똑똑한 활동가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인정할 것이다.

재능과 헌신

특히 그는 최근에 더욱 더 활동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국제적으로 아랍 혁명과 미국 ‘점거하라’ 운동 등에 고무받았고, 한국에서도 한미FTA 반대 운동 등이 부상하는 것을 보며 크게 기뻐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이 투쟁을 더욱 발전시킬 때라고 생각하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투쟁 건설에 나섰다.

그는 다함께 서울동부지구 모임에서 공개토론회와 세미나 등을 담당하는 교육 책임자였고, 모임에서 연사로도 활약했다. 그는 간결하고 명쾌한 주장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줬고, 새해 들어서는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나≫를 교재로 세미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를 신뢰하는 많은 회원들이 여기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최근에, 그가 <레프트21>에 연속적으로 기고한 미국 민중 저항의 역사에 대한 글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다. 이 글들에서 그는 미국에서 새롭게 등장한 ‘점거하라’ 운동을 찬양하며, 미국 민중 저항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교훈들을 도출하고 있다.

얼마 전에 그는 다함께 신입회원의 군 입대 자원을 만류하고 같이 활동하자고 설득하려고 새벽 6시에 찾아가기도 했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회원들과 우호적으로 토론하고 논쟁할 줄 알았고 개입주의적이었다.

주변 동지들은, 근래 들어서 그의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고무받으며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레프트 21> 신문사에서는 그가 상근 기자가 돼서 더 많은 기여를 해주길 제안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더욱 안타깝고 가슴이 미어진다.

뼛속 깊이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떠났지만 그가 사회주의 운동에 한 기여는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레프트21>에 기고한 글에서 “원칙이 확립된, 응집력과 경험을 갖춘 활동가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슬퍼하기보다는, 조성민 동지의 신념과 뜻을 잊지 않고 이어나가기 위한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2012년 1월 1일

다함께

 

 

▶ 분향소 :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8호

▶ 발인 일정 : 2012년 1월 3일(화) 오전 8시 30분에 발인하고 벽제로 출발

▶ 문의: 최인찬(010 – 8351 – 8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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